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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76.2.27 강화도 조약

1895.8.20 을미 사변

1896.2.11 아관파천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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강화도 조약(1876 2 27)


- 국제법 토대로 이루어진 최초의 근대식 조약

- 한일 양국간 합의하에 이루어졌지만, 불평등 조약


배경

-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인해 협상을 강요.

* 운요호 사건 (1875) : 일본의 군선 운요호가 측량을 구실로 불법으로 강화도에 침입하여 조선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

- 1876 년 일본은 운요호를 포격한 것을 구실로 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.


결과

- 당시 쇄국정책이었던 조선은 일본에 강요에 두 가지 의견으로 파가 갈림. (당연하겠지만..)

- 찬성파 : 박규수, 오경석 등 개화세력

- 반대파 : 흥선대원군 일파 등 위정척사세력

- 찬성파가 득세하여 강화도 조약 개방정책에 찬성도장을 찍게 됨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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을미사변 (1895. 08. 20)


-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잃은 후, 민씨일파가 득세하자, 민비(명성황후)를 암살하자는 계획을 세움.

(단순 사건이 아닌 일본 총리가 시해계획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. http://www.chosun.com/national/news/200510/200510050403.html)

* 삼국간섭 : 일본이 독,프,러의 요청에 의해 라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억지로 반환한 사건. 해당 사건으로 명성황후등의 세력은 일본보다 러시아를 가까이 하였다.

(이로인해 조정이 대폭개편되었으며, 이완용이 여기서 친러인사로 등장함..ㅡㅡ;)


- 일부 조선군의 협력에 힘입어 경복궁으로 침투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함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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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관파천 (1896. 2. 11)


- 을미사변 이후 조선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에 달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남.

- 이를 보호하겠다는 명목하에 러시아 공사관 당시 공사였던 베베르는 1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옴.

- 2월11일 국왕의 거처를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김.

- 기간 : 1896 2 11 ~ 1897 2 20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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